부산일보는 60년 4월 12일 얼굴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앞바다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김주열군 사진을 특종보도해 4.19혁명의 도화선 역할을 한 가슴벅찬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5.16 군사정권에 의해 경영권이 5.16 재단으로 넘겨지면서 그 자랑스런 기억은 점점 퇴색하기 시작한다.27년간 강요돼 온 침묵과 굴종은 마침내 부산일보를 숙명적인 여당지라는 굴레에 가두고 만다.

80년대 들어 박종철 고문치사와 관련된 「눈물의 타종」특종사진이 우리 신문에서 외면되고 남의 지면에 실릴 수 밖에 없었던 암울한 상황 등이 중첩되고 6.10 항쟁을 거 치면서 부산일보 노동조합은 태동의 기운이 일기 시작한다.

60.70년대에도 부산일보의 투쟁은 간헐적 으로 진행돼 왔다.경영권이 5.16 재단으로 넘겨진 후 재단은 신문제작과 관련된 모든 부분에서 간섭을 노골화했다.

64년 11월 24일 사설에 「다시 언론자유를 생각한다」를 게재해 필화사건이 발생했고 74년 6월16일에는 편집국 기자 전원이 공 정보도를 요구하며 일괄 사표를 제출하며 2일간 제작저지 투쟁을 벌였으나 기자 1명이 의원 사직하고 4명이 지방주재 기자로 쫓겨 나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또 74년 기자일동은 유신체제에 항거,언론자유수호와 자자유언론실 천 3개항의 결의안을 채택하고 투쟁에 나섰으나 동아 조선투 위 사태 와 함께 좌절됐다.

80년 언론대학살의 수난을 거치면서 가장 암울했던 5공하에서 굴욕 을 당해오던 기자일동은 86 5월 17일 자유언론실천인 「우리 의 결의 」라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투쟁을 재개,87년 2월 11일 박종철 고문치 사 사건 형제복지원 사건 등 시국사건을 보도지침에 따라 왜곡편파 보도하는데 항의,성명을 내고 당시 윤임술 사장 김기철 상무가 좌지 우지하던 편집국 제작회의를 편집국장 책임체 제로 환원시켰다.

이어 △87년 6월 5일 기자일동은 全斗煥씨의 장기집권음모책이었던 4·13 호헌조치 철폐와 편집권의 진정한 독립을 요구하는 「현 시국 에 대한 우리의견해」를 발표했고 △같은 해 8월 12일 관제언론의 표 본 尹사장 金상무의 퇴진과 부화뇌동한 편집국 간 부들의 양심선언을 요구하며 실력행사 직전까지돌입했다.

당시 尹사장은 자신의 퇴임거취가 88년 2월 주주총회 때 결정될 것 이란 약속을 저버리고 金상무만 ㅉ아낸 뒤, 종래의 제작태도 를 고수 했다.

기자 일동은 記協차원에서의 투쟁에 한계를 인식, 합법적 단체인 노 조의 결성만이 민주언론의 정통성을 바로세울 수 있는 최 선의 방책 이라는데 의견을 같이하게 된다.

이같은 의견일치를 본 뒤 편집국 소속 기자6명은 내밀한 기초작업을 끝내고 은밀하게 뜻을 같이하는 동료를 규합, 마침내 釜 日노조를 잉 태시킬 수 있었다.

6명의 기자는 우선 편집국 기자를 중심으로 노조를 결성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한국기자협회 釜山日報지부가 표면에 나 서기로 결 정했다.

이 구상에 따라 金鍾烈 기협 釜山日報지부장(당시 생활특집부 차장) 조영동 부일노조 초대위원장 등 6명은 기초작업에 본격 착수하게 된다.

88년 1월 6일 釜日노조결성 준비위가 발족되고 위원장은 金鍾烈 記協지부장이 맡았다. 이어 1월 9일 2차 모임을 갖고 규약작 성 및 신고에 필요한 제반 서류를 갖추는 총무반, 초대 임원진 구성과 결성식을 준비하는 조직반, 창립발기문 작성과 결성후의 대내외 홍보작업을 맡을 홍보반 그리고 사내의 근로여건

공정보도실태 등을 조사 준비할 사업반으로 역할을 분담, 본격적인 결성 준비에 들어갔다. 또한 6명의 결성준비위원에서 다소 범위를 확대해 뜻있는 기자들에게 결성준비를 비밀리에 알리기로 했다.

마침내 노조결성 D데이가 88년 1월 22일(金)로 최종 확정됐다.

기협釜山日報지부는 1월 22일 하오 5시 30분 편집국회의실에서 신임 집행부 출범후 첫 임시총회를 개최 한다는 방(榜)을 내붙였 다. 안건은 '釜山日報노동조합 결성 건(件)' 이었다.

이날 역사적인 장소 편집국회의실 에는 본사근무 기협회원 76명중 59명이 참석, 金鍾烈지부장의 주재로 곧바로 안건심의에 들 어갔다.

대다수 참석자의 의사에 따라 이날 노조결성 찬반여부를 직접 무기명 비밀투표에 부친 결과 찬성47 반대9 기권3표로 79.7%라 는 압도적 지지로 釜日노조가 정식출범하게 됐다.

이 투표결과에 따라 「釜山日報 노동조합결성대회」가 바로 이어졌으며 朴炳坤기자의 결성취지문 낭독이 뒤따랐다.

이어 규약채택을 끝내고 임원선출에 들어가 趙永東기자가 추천에 의해 초대조합장에 단독 입후보, 찬성39 반대6 무효1 기권2 표의 투표결과에 의해 정식으로 선출됐다.

 

「민주언론 쟁취」「공정보도 우리의 소원」「편집국장 내손으 로」의 주장을 내걸고 6일간 벌인 총파업은 구시대적 억압구조에 눌려 파행적으로 운영되어온 부산일 보가 자주적이고 독창적인 민주언론의 첫발걸음 내디딜 수 있는 단초 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한국언론 역사상 큰 획을 긋는 기념비적 사건 이라 할 수 있다.

부일의 투쟁이 승리로 끝날 수 있었던 것은「편집국장 3인 추천제 」의 주장 이 정당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집행 부를 정점으로 한 조합 원의 단결력, 애독자와 전국언론의 뜨거운 지지, 간부사원의 지원등 이 한데 어우러 졌 기 때문이다.

88년 1월 22일 노조결성과 함께 운영 위. 대의원회. 공정보도위. 노보. 조직부. 교육부 등이 구성됐다.

운영위는 노조집행부로서 평상시에는 노동조합보(報) 제작과 공정 보도위원회의 활동에 힘을 쏟다가 6월 30일 단체교섭부진에 따른 쟁의발생신고 이후에는 쟁의대책위원회로 전환, 냉각기간후 파업 투쟁까지 16일간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운영위 구성은 趙永東 조합장을 비롯,朴相守. 裵守生. 朴昌浩. 鄭서환 부조합장, 權明保 사무장,朴炳坤 공정보도위 간사, 宋東善 노보편집 실장, 姜宗奎 총무, 朴鎭守 조직, 李憲律 교섭쟁의, 安峯模교육, 文玲眞 조사통계, 金鍾煥 복지, 裵鍾烈 근로환 경, 朴萬龍 기술개발, 金吊 섭외부장과呂煥燮 회계감사겸 무임소운영위원 등 모두 18명 으로 되었다.

趙조합장은 내부결정사항과 대외적인 중요섭외, 言勞協관련일을 맡 고 4명의 부조합장은 쟁의에 필요한 각종 장비구입, 성명서 작성, 외 부단체 연락등을 담당했다.

집행부는 4월 11일 하오 5시30분 10층 소강당에서 열린 제1차 釜山 日報노동조합임시총회에서 그간 심의해온 단체협약안을 표 결에 부 쳐 당시 조합원 2백8명중 1백49명이 참석한 가운데 만장일치로 통과 시켰으며, 이에 따라 단체교섭실무위와 단체교섭위를 운영해 왔다.

그러던중 6월 7일 열린 제23차 운영위에서 실무위의 협상진척이 늦 어지고 중요 쟁점사항을 회사측이 계속 보류시키고 있기 때 문에 단 체행동이 불가피하다는 의견이 집약됐다.

운영위는 쟁의라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 이날 쟁의준비위원회를 구성 키로 결의하고 朴昌浩 부조합장, 權明保 사무장, 李憲律 교섭쟁의부 장과 전광부 魚成漢 대의원, 판매부 徐균석 대의원, 생 활특집부 林鍾洙 대의원, 윤전부 朴善泰, 제판부 金出鉉, 교열 부 鄭순형 조합 원 등 9명을 쟁의준비위원으로 선임했다.

이어 6월 24일 편집국 회의실에서 열린 6차 대의원회에서 대의원 28명중 24명이 참석한 가운데 쟁의발생신고 여부를 무기명 비밀 투표에 부친 결과 찬정 21 반대 3표로 신고를 결의, 신고시기는 조합장에게 일임키로 의견을 모았다.

노조는 6월 26일 일요일 상오 10시 22차 운영위(5월 31일) 결정 사항인「노조단합대회겸등반대회」를 東萊 산성에서 개최, 20 0여명의 조합원이 참석한 가운데 대동놀이한마당,노조방향정립, 단합의지 천명 등 단결된 힘을 과시했으며 이자리서 조합원들은 「우리가 힘을 뭉치면 어떤 난관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운영위는 이후 단체교섭이 수차례 결렬됨으로써 6월 30일 부산시와 부산지방노동위원회에 쟁의발생신고를 하기에 이르렀고 이때부터 노동조합 특보를 제작해 조합원들에게 배포,투쟁의지를 심었다.

6월 30일 하오 8시의 쟁의대책위에서 회사건물 외벽에「투쟁하는 釜日노조 깨어나는 釜山日報」「우리의 소원은 공정보도」「 민주언론 쟁취하자」는 내용의 대형 현수막을 제작,부착키로 했으며 투쟁방법은 1차로 리번을 달고 근무키로 결의했다.

7월 1일에는 「쟁의발생신고에 즈음한 우리의 입장」을 대자보로 만들어 각층마다 붙이는 한편 회사측이 현수막 부착행사를 방해한 것을 규탄키로 하고 쟁의경비조달을 위해 조합원들의 성금을 접수 키로 의견을 모았다.

7월 3일 열린 쟁의대책위에서 회사측이 잡은 10층 옥상출입문의 열쇠를 따로 맞춰 옥상에서 30m짜리 대형현수막 부착에 차질 이 없도록 의논, 4일 하오 현수막을 성공적으로 달았다.

또 5일부터의 「30분 일찍 출근하기」와 「尹任述 사장에게 보내는 공개질의서」를 작성, 8장의 전지로 대자보를 만들어 8곳 에 부착했다.

4일의 쟁의대책위에서는 5일부터의 잔업거부를 결정하고 이날 단체교섭에 尹사장이 나오지 않은 것을 규탄할 자료를 모은 뒤 각 파트별로 대토론회를 개최토록 안을 만들었다.

5일 하오 8시 노조사무실에서 있은 쟁의대책위에서는 6일부터 운영위원 18명이 전원 철야농성에 들어가기로 결의, 장소는 4층 편집국으로 정했다.

5일 쟁의특보에는「호외」로 최근의 불공정보도 사례를 분석한 내용을 싣기도 했다.

6일 쟁의대책위에서는 쟁의형태를 다양하게 구성하자는 의견이 대두돼 7일부터 「퇴근거부」를 결의했으며 대의원들도 철야투 쟁에 동참할 뜻을 밝혀왔다.

7일에는 냉각기간중 각계에서 보내온 성명서와 성금내역을 대대적으로 노보에 실어 조합원들의 투쟁의지를 높였으며 본격쟁의 를 사흘 앞두고 「회사는 진정 파국을 원하는가」라는 제목의 경고 문을 작성, 이튿날 노보에 실었다.

이날 쟁의대책위는 쟁의냉각기간 종료가 임박함에 따라 8일중 10층 대강당에서 전 조합원 비상총회를 갖기로 하고 이 자리서 파업여부를 결정키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8일 하오 5시30분 비상총회의 파업여부 찬반투표 결과 찬성 261, 반대 13표의 압도적 결의로 파업돌입이 결정됐고 이같은 사실은 즉각 사용자측에 전달됐다.

냉각기간 10일중 회사와는 냉각기간이 하루 지난 7월 10일 일요일 단 한차례의 교섭이 있었으나 여전히 회사측에서 추상적인 편집권독립 조항을 들고나오는 바람에 결렬, 파업에 이르게 된 것이다.

趙조합장은 6차 대의원회에서 쟁의발생신고를 결의할 때 쟁의에 들어가더라도 꼭 파업이란 마지막 수단을 사용한다고 말할 수 는 없다며 단계적 쟁의행위를 도입할 뜻을 비쳤으나 냉각기간중 단

한차례의 교섭밖에 이뤄지지 않은데다 尹사장이 신문제작의 민주화에 전혀 뜻이 없음을 간파, 냉각기간종료 3일전에 파업의 뜻을 운영위에서 피력, 의견이 집결됐었다.

파업 하루 전날인 10일(일요일)의 쟁의대책위에서는 『쟁의특보를 조합내에 배포하자』와 『신문 대신에 독자들에게 모두 배 포해 우리의 입장을 전 시민에게 공개하자』는 의견이 대두됐으나 결국 독자 모두에게 배포하고 타블로이드 배판인 신문크기 양 면에 내외관련 기사를 메우기로 했다.

11일의 쟁의대책위는 마침내 尹任述 사장의 퇴진요구를 결의했다.

이날 하오 노조는 성명서를 작성, 『파업이라는 언론사상 유례가 없는 안타까운 사태를 맞고도 尹사장은 계속 고압적인 자세 로 타협을 어렵게 만들고 심지어는 직장폐쇄 운운하는 등 회사대표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 尹사장은 스스로 퇴임, 釜山日報 의 기능을 하루빨리 정상화시키라고 촉구했다.

대책위는 이날부터 구호내용을 「尹사장 물러가라」는 내용에 맞춰 새로 만들어 단체행사에 등장시켰다.

이날 사내 국·국실장, 논설위원, 부장 등 간부사원 70여명도 「노조원의 요구와 투쟁을 전폭 지지한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대책위에 전해왔다.

이날 오전 각 신문과 방송에서는 한국신문협회가 편집권은 경영권에 귀속된다는 요지의 성명서를 발표한 것이 그대로 보도돼 대책위에서는 즉각 반박성명을 작성하는 한편 이 문구의 처음 출처를

조사하던 중 신문협회의 성명내용이 1948년 1월 4일 맥아더 군정치하의 日本신문인협회 이사회가 밝혔던 켸켸묵은 구시대 유물임을 알고 크게 분노했다.

釜日투쟁은 결국 전국언론사노조와 경영자 모임인 신문협회간의 싸움으로 비화됐고 釜日노조는 그 대리전(代理戰)을 치르는 결과가 됐다.

이때쯤부터 전국 각 언론사와 시민, 산업체노조 등에서 격려전문과 지지성명서가 잇따라 노조사무실로 전해졌다.

12일, 파업 이틀째 平民黨조사단(단장 朴英淑 부총재) 일행 5명이 釜日노조를 방문했고 부산시민 지원대책위 결성소식과 함께 범시민 釜日투쟁지지운동 소식이 대책위에 전해져 이미 이 투쟁은

노사의 문제를 뛰어 넘어 전국적 이슈로 등장했다.

民主黨에서도 13일 오전 金泳三총재 주재로 대책회의가 열려 釜日노조입장을지지했다.

회사측에서도 이제 갈데까지 갔다는 생각에서인지 단체교섭의 제의는 없었다.

대책위는 1차 장애요소인 尹사장의 퇴진이 실현된 후에야 교섭을 제의할 의도였다.

13일 대책위에서는 『서울의 正修재단 이사회가 아직 현장의 긴박한 사정을 모르고 있다. 200명 정도의 조합원이 서울로 올라 가 사장퇴임 등 현안을 처리토록 하자』는 주장과 『서울에 갈 필요는

없다. 이사회 사무실 앞에서 농성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는 의견이 맞섰으나 결국 서울행은 거론하지 않기로 결론이 났다.

이미 간부사원 2명은 12일 밤 尹사장 퇴진을 요구키 위해 상경했었다.

대책위는 이제 「正修재단의 개편」문제를 들고 나오기로 하고 재단 이사진 구성과 이사 몇 명의 인물됨됨이 5공화국 권력유착 형 언론인들임을 전국에 알렸다.

正修재단문제가 나온 것도 이날 당시 宋전무가 전무실에서 「서울서 尹사장이 전화로 불러온

내용」이라며 趙조합장에게 보여 준 메모 때문이었다.

이 종이쪽지에는 「노조측이 제의한 편집국장 3배수 추천을 취소하면 사장은 그 즉시로 사퇴한다.

노조가 편집국장 3배수 추 천을 취소치 않을 때는 사장은 사임치 않는다」며 3배수 추천안은 편집권의 위협과 경영권의 침해라는데 재단이사 전원의 의견이 일치됐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재단이사회는 尹사장을 희생양으로 해 편집권독립을 막아보자는 의도였음이 분명했다.

대책위는 14일부터 노조사무실에 임시 홍보실을 마련, 취재진들에게 정확한 사태추이를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알려주었다.

13일 밤 金泳三 총재가 6층 노조사무실과 5층 사장실앞 대의원농성장을 방문, 격려했다.

이 자리서 趙조합장은 『이번 사태는 釜山日報의 차원을 넘어 한국 전 언론노조와의 연대투쟁국면으로 접어들었으며 우리는 거듭 태어나기 위한 이같은 고통을 선구자적 입장에서 감수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즈음 日本 아사히신문 NHK방송 등 외신과 내신기자 20여명이 노조사무실에 몰려와 열띤 취재경쟁을 벌였다.

15일 釜山日報 파업지원 및 민주언론추진 부산시민운동협의회가 中구 大昌동 동오빌딩 4층 강당에서 발족돼 가두서명과 각종 강연회 등을 개최키로하고 이를 쟁의대책위에 통보해왔다.

正修재단은 이날 오후 5시 서울 신라호텔에서 긴급이사회를 열고 △尹任述 사장을 해임한다.

△임원중심으로 사태수습대책위 원회를 구성한다. △사태수습 후 사장 등 임원진을 개편한다는 내용이 서울지사로부터 노조사무실로 전화로 전해졌던 것이다.

이어 宋正濟 전무는 이날 오후 즉각 서울로 가 재단측과 협의끝에 당초 회사수정안인 △회사와 노조는 편집책임자의 편집권을 존중한다. △ 회사는 편집국장 인사에 있어서 노조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한다는 2개항에 △ 회사와 노조간에 별도 기구를 구성, 이 문제를 협의한다를 추가, 노조에 제시했으나 대책위는 노조안에 전혀 근접되지 못한 것으로 보고 이를 거부했다.

16일은 오전부터 대책회의가 하루종일 열렸다.

사용자측에서 즉각적인 단체교섭을 제의해 와 오전 11시부터 하오 7시50분까지 8시간50분에 걸쳐 3차례에 걸친 마라톤회의가 열렸으며 10차 단체교섭위에서「편집국장 추천제」에 노사 쌍방이

극적으로 합의했다. 노조는 17일 「편집국장 3인 추천제 관철 」을 머릿기사로 올린 쟁의특보를 발행했고 18일부터 신문발행이 정상화 됐다.